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1세 (문단 편집) == [[모래성]] 위의 [[왕권]] == [[제임스 1세]]는 선대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능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이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통치 경력도 있었는데다, 튜더 왕조에서 물려준 강력한 왕권과 청교도와 성공회를 단합시키는 등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가 사망한 후 차남[* 차남이긴 하나 형이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막 즉위한 찰스가 당면한 문제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 올라가고 오랜 시간 동안 곪아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 초기에는 헨리 7세 시절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몰락하고 왕실에서 패배한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귀족 가문은 30여 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튜더 왕조는 재정적으로나 권력으로나 절대우위를 누리며 절대왕정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대외 팽창과 전쟁으로 재정적 수요가 폭증하면서 소수 귀족을 제외한 [[젠트리]][* 사실 영국의 귀족제도 특성상 극소수의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사회 지도층은 모두 젠트리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귀족 가문의 차남 이하의 후손이나 지주계층이었다. 해당항목 참조]에 대한 의존이 강해졌고 이들 세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이미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절대 왕정의 바탕이던 왕실 토지들은 [[젠트리]]들에게 팔아 넘기면서 기반이 약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에 손 벌리거나 백성들에게 욕먹는 새로운 과세보단 왕실소유 토지를 팔아치우는 걸 선호했기 때문. 따라서 후대 왕이 될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그들은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들어온' 왕조였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계였다.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강력한 왕조는 아니었는데,[* 애당초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잉글랜드보다 개판인 데다가 스튜어트 왕조 자체가 동군연합 전 제명에 죽은 왕도 얼마 안 된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인 클랜들이 왕권 강화를 틈만나면 방해했다.]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운 좋게 얻기는 했지만 세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스코틀랜드는 이때까지도 잉글랜드에겐 외국이었고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가 외국인터라 잉글랜드와 합치기를 거부했기에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더불어 [[헨리 8세]]는 수장령, 특히 [[토마스 크롬웰]] 처형 이후로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며 군사 활동이나 사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매입한 상공업 계층은 [[젠트리]], [[요먼]] 계층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더이상 헨리 시대의 거수기 노릇은커녕 국왕권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의 세력도 강성해져 국교회([[성공회]])를 지지하던 국왕과 대립하는 판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긴축정책과 해외 투자, 드레이크 등의 해적질 수입 등으로 이를 메웠었지만 아버지가 만든 빚이 하도 많다 보니 미봉책에 불과하여 [[잉글랜드 국왕]]의 재정적 기반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임스 1세]]는 강력한 왕권을 원하여[* 사실 제임스 1세의 구상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증손녀 대인 앤 여왕대에 이르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되었고, 후에 아일랜드도 통합하게 되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를 위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했다. 당연히 의회는 심하게 반발하였으며[* 섬나라인 영국에서 육군을 만들 필요 자체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국이 전국시대로 전쟁이 수도없이 벌어져 육군의 비중이 커진 일본과 달리 이 정도로 전쟁이 많이 벌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육군을 대규모로 양성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프랑스와 끊임없이 전쟁을 하다보니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기에 전쟁을 피할수밖에 없었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근대에 가서야 병합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육군을 만들면 대체 그 창끝이 누구한테 가장 먼저 향할 지는 뻔할 뻔자다. 사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갈등했는데 상비군의 양성은 바로 귀족들을 억누르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는 것이라서 귀족들이 좋아할리가 없어서 기를 쓰고 상비군 양성을 방해했다. 중앙집권이 잘된 한국, 중국, 일본만 해도 조선, 송나라, 에도 막부 시기에 접어들어서야 중앙집권이 되었지 그전에는 유럽처럼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의 봉건제 국가였다.], 제임스 1세는 이 문제로 의회와 자주 충돌하였고 의회를 여러 번 해산시켜버릴 정도로 갈등했다. 제임스 1세와 의회가 얼마나 사이가 좋지 못했던지 제임스 1세가 병으로 죽었을 때는 이것이 [[암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렇긴 해도 가능성이 높은 말은 아니다. 애시당초 당시 국왕인 제임스 1세도 왕위에 올릴 왕족의 수가 적어서 스코틀랜드에서 데려와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제임스 1세와 의회가 많이 싸우고 해산시키고 해서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적어도 제임스 1세는 국민들에게 평판좋은 왕이었고 정치력도 나쁘지 않았으며 파국이 생길 정도의 일도 없었다.(반면 후술하겠지만 찰스 1세는 적국에 붙는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임스 1세가 암살당했다면 그 아들인 찰스 1세를 왕위에 올려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